“중국 증권시장의 신”, 양화이딩 71세의 나이로 별세

박효준 기자 | 기사입력 2021/06/16 [13:12]

“중국 증권시장의 신”, 양화이딩 71세의 나이로 별세

박효준 기자 | 입력 : 2021/06/16 [13:12]

[데일리차이나=박효준 기자]

 

▲ “양백만”으로 불리우던 양화이딩씨가 14일 사망했다. © 데일리차이나   © 데일리차이나

 

중국 신화통신은 지난 14일 저녁 '중국 최초의 주식투자자'로 불렸던 양화이딩(杨怀定)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수개월 전 이미 장기간 당뇨병을 앓고 있던 양화이딩은 합병증으로 입원하여 응급치료를 받는 도중 613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멋지게 살았으니 여러분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의 아들 양위치(杨钰琦)는 기자들과 만나 아버지의 뜻을 밝혔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30년 동안 다사다난했던 중국 시장 개방의 길은 수많은 시대의 개척자들을 만들었다. 양화이딩은 그중 한 사람이며 중국 증권시장의 '전설'로 꼽힌다. 1980년대 말 국고채 매매를 통해 큰돈을 번 그는 중국 개미 투자자의 일인자로 개혁개방 이후 제1세대 개인투자가의 모든 희비를 체험하였다.

 

'중국 최초의 주식투자자'로 불리다

양화이딩은 1950년생이다. 본적은 장수성 진강(江苏镇江)이며 본래 상해 철합금 공장(上海铁合金) 종업원이었다. 1988년 봄, 중국 정부는 국채(国债) 양도를 61개 도시에서 풀어놓는 것을 시작으로 지방간 국채 가격차가 나타났다. 당시 그는 해당 국채를 사고팔아 생애 처음 돈을 벌었다.

 

양화이딩은 이후 상하이탄(上海滩) 최초의 증권투자 거부(巨富)가 되었다. 주식투자로 얻은 수익이 백만 위안(17464만 원)이 넘었기 때문에 '양백만‘(杨百万)이라 불리며 일부 매체에서는 '중국 최초의 주식 투자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중국 증권시장의 최초 경험자, 실무자 및 목격자로서 양백만은 증권시장에서 많은 첫 번째의 호칭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대량 국채 거래에 몸담은 개인, 첫 번째 개인 중국 인민은행 자문, 첫 번째 보안업체에서 경호원을 고용한 개인, 첫 번째 개인 세무청 방문, 첫 번째 개인 변호사 선임, 첫 번째 개인 투자자로 대학교수로 임용 등 많은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맡았다.

 

그의 이야기는 미국 시사잡지 '타임스', '뉴스위크'를 비롯해 세계 언론에 소개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행진에 세계 언론이 관심을 갖는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중국 증권시장의 최초 참여자와 목격자 중 한 명인 '유명 개인 투자자'로서 20여 년의 다사다난한 중국 당대 역사를 거쳤다. 시장에서 종횡무진하고 중국의 개혁개방과 증권시장의 발전에서 대체할 수 없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또한, 그는 1998년 신화통신과 중국 관영 매체 CCTV에서 '개혁개방 20년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만에서 100만까지, 국채를 운용하며 유명해지다

중국 매체 재정잡지财经杂志에 따르면 1988년 양화이딩은 공장일을 그만뒀다. 구직 기간에 그는 많은 신문을 뒤적거리는 도중 국채 투자의 기회를 발견하였다. 양화이딩은 이를 투자 기회라고 여기고 국채를 매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988421일부터 중국 정부는 국채의 거래를 개방했다.

 

1985년 기준 국채의 개장가는 104위안, 이율은 15%이었다. 양화이딩은 재산 2만 위안(349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고채권의 1년 이자는 3000위안(52만원)이었으며 은행 이자는 1080위안(18만원)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 재산을 국채에 투자하기로 판단하였다. 당시 국채의 가격은 연일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는 불안하여 매일 오후에 거래소에 가서 시세를 살펴보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의 사직 전 월급이 68위안이었는데, 당시 그의 월급은 괜찮은 편이었다는 것이다.

 

천부적으로 사업수완이 있던 양화이딩은 104위안에 사들인 국고채권을 112위안에 팔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자료 조사에 착수하여 안휘성 허페이(安徽合肥)의 국채 개장가가 94위안, 마감가는 98위안으로 상해의 국채 가격보다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밤을 새워 허페이로 갔는데 도착 즉시 가격차를 이용하여 투자하여 본전 2만 위안에서 22000위안으로 2000위안의 차익을 벌었다. 그는 이 방법을 이용해 허페이를 등지로 사업을 확장했고, 상하이로 끊임없이 매입 국채를 옮겼다.

 

양화이딩은 상하이와 허페이를 80번 가까이 왕복하였다. 당시 타지에서 돈을 인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상황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몇십kg의 현금이나 국채를 상자에 담아 오갔다. 안전문제를 고려하여 그는 전문 경찰들을 초빙해 실탄을 휴대하고 자기를 보호하게 하였는데, 중국 매체 해방일보(解放日报)에서 이는 중국 최초로 공안군을 개인 초빙하여 보안원으로 한 사건임을 보도했다.

 

양화이딩은 세금 문제로 불안하여 주동적으로 중국 세무청을 찾아가 국고권을 매매할 때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지 자문하였다. 관련 조례에 근거하여 세무국 직원은 국고권은 면세된다는 조례에 근거하여 양화이딩이 국고권의 매매 수입으로 세금을 납부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하고 그의 주동적인 세금신고행위를 표창하였다. 이 일을 겪은 후 그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국채 매매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는 19884월부터 1989년까지 100만 위안(17451만원) 이상을 벌면서 '양백만'으로 이름을 알렸다.

 

수익률 하락, 주식 투자로 돌아서다

1989년 그는 금리의 인상으로 신용 공사와 은행이 수십 년치 이익을 붙여 부실의 늪에 빠졌다는 글을 봤다. 금리 인하가 임박했다는 신호라고 느낀 그는 국고채를 버리고 주식을 사들이기로 과감히 결정했다.

 

1990년 상하이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 첫 배럴을 건진 양화이딩은 주식시장으로 옮겨갔다. 당시 상하이의 주식시장은 매우 침체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신흥 개념을 믿지 않았지만, 양화이딩은 주식에 집중했다. 그의 성공을 이끈 것은 1993년 상하이 증시였다.

 

당시 상하이지수는 400포인트에서 1500포인트까지 상승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장세가 결국 1800포인트까지 오를 것이라고 말했지만, 양화이딩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으며, 동시에 각 개인투자자들에게 충동적으로 개입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상하이지수는 장중 1,000선 아래로 폭락했고, 오직 양화이딩만이 1,500선 초반에 이미 모든 보유 매물을 매매했다. 이때부터 투자의 신이라는 칭호가 그의 이름에 붙었다.

 

양백만하나의 상징이 되다

중국 매체 중국증권(中国证券)은 양화이딩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시대가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아 역사를 돌아보면 '양백만'이라는 세 글자가 이미 중국 증권역사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지 않는 등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지만, 최근 2년간 중국 주식시장이 크게 출렁이는 것을 보고 개인 투자자들에게 소리 높여 주의를 주었다. 그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남은 과제는 개인 투자자들의 보초를 서는 것이며 이것이 자신이 시장에 환원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시장에서 성숙한 투자 이념을 알리고, 시장의 안정적 성장을 뒷받침하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개혁개방 시기에 중국의 금융투자를 주도했던 양화이딩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식투자를 평생 사업으로 삼았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성공을 개척한 양화이딩, 그의 죽음에 수많은 중국인들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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