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시진핑, 그는 누구인가

박효준 기자 | 기사입력 2021/10/05 [19:42]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시진핑, 그는 누구인가

박효준 기자 | 입력 : 2021/10/05 [19:42]

[데일리차이나=박효준 기자]

▲ 문화대혁명으로 하방된 젊은 시절의 시진핑 <사진=百度 제공>  © 데일리차이나


중국 13억 인구 가운데 최고의 1인 자리에 오른 시진핑 중국 주석은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정치인이다. 혁명 원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고난의 청년 시절을 보냈고 지방에서 25년을 근무했다. 온화한 미소와 반대로 10번이나 거절당한 끝내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서 보듯 강한 집념의 소유자이며, 현재 중국 정치를 관통하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론가란 평가도 따라붙는다.

 

역경의 어린 시절

시진핑은 19536월 시중쉰(习仲勋·1913~2002) 전 부총리의 두 번째 부인 아들로 태어났다. 시중쉰은 당의 혁명 원로이자 광둥(广东)성의 개혁·개방을 이끈 인물이다. 하지만 시진핑이 9살이던 1962년 발생한 류즈단(刘志丹)사건이 원인으로 부총리직에서 실각해 온 가족이 고초를 겪는 치욕을 겪었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서북 혁명 근거지의 창건자인 류즈단의 생애를 묘사한 소설을 해당 작가가 류즈단의 전우였던 시중쉰에게 사전 검토를 맡겼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한 전우 가오강(高岗)이 미화됐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마오쩌둥에 의해 반당분자로 낙인 당하며 결국 반당 활동을 한 것으로 내몰렸고, 부총리 직위는 즉각 해임됐다.

 

시중쉰은 마오쩌둥에게 농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1965년 뤄양(洛阳)의 한 공장으로 무대를 옮겨져 생활한다. 이 일로 부자(父子)7년 동안 헤어지게 된다.

 

1969년 막 중학교을 졸업한 16살 시진핑은 당시 공산당 상산하향(上山下乡) 방침에 따라 도시를 떠나 하방(下榜)됐다. 하지만 하방 생활도 안전한 삶은 아니었다. 당시 농촌 주민들은 도움이 될 만한 기술도 없으면서 음식과 주거면에서 부담만 되는 청소년들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하방 생활 도중 청소년들이 농촌 주민들에게 매를 맞고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시진핑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하방 초기, 시진핑이 육체노동의 괴로움과 농촌 생활 부적응으로 몰래 베이징으로 도망갔다가 이모·이모부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래에 비해 키가 컸던 그는 의료보조원, 육체노동자, 수리공으로 일을 하는 등 육체노동에 힘쓰면서도 독서를 즐겼다.

 

시진핑이 회고하길 이때의 농민 생활을 경험한 건 자신에게 중요한 자산이 됐다고 한다. 그가 하방 생활을 했던 옌안(延安)은 공산당 혁명의 본고장이자 아버지 시중쉰의 근거지였던 산시성에 속해 있었고 그곳엔 서북 시중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갖가지 노동을 겸하며 시진핑은 8차례 시도 끝에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가입에 성공했고, 10차례 이상 시도한 끝에 공산당에도 입당했다. 곧이어 당 량자허(梁家河)의 서기를 맡기도 했다.

 

7년의 하방 생활에 대해, 시진핑은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실제란 것이 무엇인지, 실사구시(实事求是)란 무엇인지, 군중은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둘째,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시진핑이 속한 세대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청소년기 사고가 형성되는 시기에 정규교육 대신 문화대혁명을 겪은 탓에, 민주주의를 이해하거나 공감할 능력이 결여된 채 마오쩌둥 사상만을 주입당했다는 것이 비판이 요지이다. 그들이 하방 시기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 개념의 공포와 불안 속에 떨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떠오르는 샛별

 

▲ 젊은 시절의 시진핑 주석<사진=百度 제공> © 데일리차이나  

 

시진핑은 하방된 ‘지식청년(知识分子)’ 가운데 모집한 공농병(工农兵) 청강생으로 선발돼 1975년 칭화대 화학공정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물리·화학 등 기초지식에는 무지했다.

그와 함께 화공과에 입학했던 천시(陈希)는 그의 멘토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됐다. 천시는 대학 졸업 뒤 연구생으로 학교에 남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 방문학자가 됐으며, 현재 칭화대 서기를 거쳐 정치국원이 되어 중앙조직부장 겸 중앙당교 교장을 맡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가던 1976년 1월, 인후암에 걸린 저우언라이(周恩来)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 4인방(四人帮)에 의해 잠시 복권됐던 덩샤오핑은 다시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7월에는 주더(朱德)가 사망했고, 같은 달 탕산(唐山) 대지진이 일어나 24만여 명이 숨졌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고 문화대혁명 사인방이 체포됐다. 결국 1975년 공산당의 감시에서 풀려나, 뤄양에서 가족과 ‘요양 휴식’ 조처를 받은 시중쉰은 사인방의 퇴장을 계기로 당에 편지를 보내 복귀를 요청했다.

 

1978, 시중쉰은 드디어 베이징으로 돌아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全国人民政治协商会) 상무위원이 됐다. 곧이어 해방군 원수 예젠잉(叶剑英)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광둥성 2서기에도 임명됐다. 당년 말, 시중쉰은 1서기를 맡게 되며 양상쿤(杨尚昆) 공산당 제2서기의 지도하에 개혁개방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1979년, 시중쉰의 건의에 따라 덩샤오핑은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头), 샤먼(厦门)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공산당은 정식으로 ‘류즈단사건에 대한 오류를 수정해, 시중쉰의 반당 혐의를 벗겨줬다.

 

자본주의 체제와 해외 자본으로 중국 제조업을 일으킨다는 구상은 많은 공산당원들의 신념을 거스르는 개혁개방은 지금까지도 마오주의를 신봉하는 ‘좌파 비난하고 있는데, 극좌의 늪에서 벗어난  얼마 되지도 않은 때에 비난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흔히 ‘개혁개방의 선구자 불리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덩샤오핑도 개혁개방을 밀어붙일  있었다는  중론이다.

 

훗날 중국공산당 집권 이래 가장 성공적이고 인기를 얻은 개혁개방 정책에 시중쉰이 깊이 연관됐다는 것은, 시진핑에게 두고두고 크나큰 후광을 비춰줬다. 문화대혁명의 풍파를 일찍부터 겪으면서 극좌주의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시절에 대한 부담이 시진핑에겐 없었다. 오히려 이어진 개혁개방을 겪으며 역으로 그의 평생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자세를 낮추다

▲ 농촌에서의 청년 시진핑 <사진=百度 제공>  © 데일리차이나


1980년대. 개혁의 황금기이던 시절, 시진핑은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훗날 그를 가장 빛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선택이었는데, 당시 농촌 지역엔 여전히 중국 인구의 85%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2년 3월 시진핑은 베이징의 친척들에 작별을 고하고 허베이성(河北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민공사에서 서기를 맡겨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이에 고사하며 허베이성 제1서기 진밍(金铭)의 계획하에 정딩현(正定县) 부서기에 배치됐다.

 

시진핑은 도서관에서 지역 역사책인 <정딩현지正定现地> 독학하였고 지역 시찰을 통해 주요 상황을 파악했다. 일반적인 태자당(혁명가의 자녀들)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인상을  것과 달리, 시진핑은 낡은 군복에 검정 헝겊신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정도로 검소한 모습을 보여줬다. 훗날 정딩현의 민중들은 그를 “아버지 이야기보다는 하방 생활 이야기를  좋아했다”, “항상 작은 쇠그릇을 들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무 아래서 면을 먹었다라고 기억했다. 술과 친구를 좋아했지만 과음하진 않았다.

 

특히 시진핑은 당의 방침에 따라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 원로 간부들을 살갑게 보살피면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진료와 의약비를 제대로 제공받도록 제도화했다. 열심히 일하는데다 능력 있고 인기도 많았던 시진핑은 18개월  서기로 진급했다.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고 지도층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보수적인 정딩현 공무원들이 개혁개방에 소극적이었지만, 아버지가 있는 광둥성을 경험한 시진핑은 과감한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그는 드라마 <홍루몽> 세트장을 정딩현에 유치하면서 관광산업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마련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날개를 펴다

 

▲ 푸젠성 서기 시절의 시진핑 <사진=百度 제공> © 데일리차이나  © 데일리차이나


이후 1985 6 시진핑은 푸젠성(福建省) 샤먼시(厦门市) 부시장을 시작으로 닝더(宁德) 서기, 푸저우시(福州市) 서기, 푸젠성 부서기, 푸젠성장이 되기까지 17  동안 시진핑의 관료 생활은 푸젠성에서 이뤄졌다. 개혁개방 바람이 가장 먼저  푸젠성과 광둥성(广东省)에서의 성과는 전국 관료들이 모두 바라던 일이었다.

 

특히 당시 푸젠성 서기였던 샹난(项南)은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의 후원을 받는 개혁파의 대표 주자였다. 샹난은 시진핑이 샤먼에 도착하자 직접 그를 만나 지역을 간단하게 소개해주면서 격려했다. 하지만 샹난은 같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 약 사건 휘말렸다. 당시 사건은 실제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과장됐고, 개혁파 샹난에 대한 보수파의 반격 성격이 뚜렷했다. 샹난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자금을 모아 세우는 향진(乡镇) 기업을 장려했지만, 보수파는 이를 자본주의 부활이라고 비판하던 터였다.

 

이때 시진핑은 샹난의 굴하지 않는 기개에 탄복했지만 결국 정치 폭풍에 휘말리는 것을 보며, 중국 땅에서 자신의 뜻을 지나치게 강조하려 들면 끝이 좋지 않고 온건해야만 끝까지   있다는 교훈을 새겼다.

 

뒤이어 푸젠 산간 빈곤 지역인 닝더의 서기로 옮긴 시진핑은 관료들의 심각한 부패를 절실히 겪었다. 당시 중국은 부동산 개발과 토지 매각 과정에서 뇌물과 불법 보수  갖은 부패가 횡행했다. 공직자들이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한 정치를 해서는  된다는 시진핑의 주장은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시진핑 재임 기간 닝더의 부패 현실이 개선된  아니었다. 오히려 몇 년  해당 지역의 매관매직과 예산 탕진 등의 심각한 집단 부패 사건이 드러났다.

1989 6 발생한 천안문(天安门) 사건 당시 군사 개입에 반대했던 시중쉰이 실각했다. 세상은 개혁개방의 중단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동구권이 무너졌고, 중국  좌파는 개혁개방에 대한 비판을 더욱 노골화했다. 하지만 1992 덩샤오핑은 ‘남순강화 개혁개방 유지를 선언했고, 당시의 지방 관리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1990 5 푸저우시(福州市) 서기로 승진한 시진핑도 격려를 받았다.

 

푸저우는 대만을 바라보는 항구로, 시진핑은 해외 투자, 특히 대만 자본과 동남아 화교 자본 투자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가 정책결정에 참여한 일부 사업은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창러공항(长乐机场)은 인근 샤먼에 국제공항이 있는데도 시내에서 45㎞ 떨어진 곳에 짓는다며 비난을 받았다. 공항이 문을   5년도 되기 전에 11억위안(한화 약 2014억)의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중국 국가심계서(CNAO)가 타당성 검토 오류  과도한 부채 등을 지적하고 나섰다. 보고서가 나왔을  시진핑은 푸젠성장이었고, 이에 대해 채무 해결 방안 등을 만든  결국 샤먼공항에 관리권을 넘겼다. 샤먼공항이 창러공항의 자본 구조 개선안에 나왔을 무렵, 시진핑은 이미 저장성(浙江省) 서기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푸젠성장 시절 시진핑은 대만에서 민진당 출신 천수이볜(陈水扁) 총통이 집권하는 최초의 정권교체를 목격했다. 이는 곧 양안관계의 긴장과 푸젠성에 대한 투자 악화가 이어졌다. 영국 도버항에 도착한 냉동차에서 푸젠성 출신 밀항자 58명의 주검이 발견돼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푸젠성장 3 동안 시진핑은 이렇다  성과를 내지 못했다.

 

중앙으로

 

▲ <사진=新华社제공>  © 데일리차이나


1997 중국공산당 15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중앙위 후보위원에 당선됐다. 순위는 151 가운데 151, 꼴찌였다. 원래대로라면 150명으로 끊었을 텐데, 시진핑의 입성을 위해 1명을 증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즉, 공산당은 애초부터 그를 지도자 후보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자력으로 충분히 득표하지 못한 데는, 태자당에 대한 기타 세력들의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2002 10 당대회 직전 저장성으로 옮겨 부서기  성장 대리로 부임했다. 당대회가 끝나자 49살의 시진핑은 정치국원으로 승진하면서 저장성 서기가 됐다. 당시 저장성은 광둥과 장쑤(江苏)에 이어 국내총생산(GDP) 전국 3위를 기록하고 있었고, 알리바바  세계 무대로 도약하는 기업들의 본거지였다. 그에겐 전임 서기 장더장(张德江)의 그늘에서 벗어나 경제 도약을 이뤄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지방정치의 과도한 성장을 막기 위해  서기나 성장은 출신지가 아닌 곳으로 발령하는 제도적 특성상, 타 지역 인사들에게 둘러싸인  성과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미래의 지도자 ‘후보군으로 거론된 인물은 시진핑과 리커창, 리위안차오(李源潮), 보시라이(薄熙来) 등이었다. 1980년대 후진타오가 주축인 공청단에서 리커창은 시진핑이 저장성 서기가 됐을  역시 허난성(河南省) 서기가 됐다. 시진핑보다 2 어린 47 때다. 이후 랴오닝성 서기로 있으면서 민생 개선에서 성과를 냈다. 하버드대 유학을 다녀온 리위안차오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보시라이는 상무부장으로 무역전쟁 국면에서 중국의 권익을 지키는 데서 공을 세우고 있었다

 

2006 9 상하이시 서기 천량위(陈良宇)가 중앙과의 마찰 속에 낙마했고, 당대회를 불과 몇달 앞둔 2007 3월, 시진핑이 후임 상하이시 서기로 깜짝 발탁됐다. 시진핑의 깜짝 발탁은 공청단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막고  정치역량  균형을 도모한 결과라고 보인다. 시진핑은 남동생에게 상하이를 떠나 있으라고  것으로 전해질 정도로, 이때부터 극도로 몸을 낮췄다.

 

2007 10 당대회가 끝나고  지도부가 공개될  시진핑은 경쟁자 리커창과 9인의 상무위원회에 함께 입성했음을 세상에 알리면서, 리커창보다 몇발짝 앞서 입장하며 ‘승리 선언했다

 

시진핑과 리커창, 둘 만을 비교하면 베이징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1993년부터 공청단 1서기를 맡아 장관급에 오른 리커창의 학력과 경력이  화려한  사실이다. 그러나 업무 경험을 보면 공청단에 들어가 16년을 일한 리커창보다, 지방에서, 빈곤지역과 경제특구(샤먼) 거친 시진핑이 더욱 폭넓은 경험을 했다고 평가되며, 리커창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진핑은 상무위원을 맡아 중앙서기처 서기로 일하면서 당의 사상, 이론, 선전 분야 업무를 맡았고, 베이징올림픽 시기에는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티베트 시위와 그에 따른 성화 봉송 논란, 쓰촨대지진  속에서도 올림픽은 나름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하지만  후로는, 상무부총리로서 복지와 거시경제 발전을 맡은 리커창과는 달리 시진핑의 모습은 한동안  드러나지 않았다. 당대회를 두달 앞두고 2주가량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아 갖은 의혹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2012 1115 결국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을 물려받고, 이듬해 317 국가주석에 선출돼 중국 최고지도자에 등극했다.   ‘반부패 드라이브과정에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집권을 강화하는 흐름을 이어갔다. 그리고 시진핑은 최근 열린 ‘양회에선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 임기 제한을 폐지했다. 그 이후 시진핑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주석으로 굳건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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